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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월드랠리팀의 오트 타낙, 서구 문명 발상지에서 열린 ‘신들의 랠리’에서 2위를 차지하다

2021-09-28

현대 월드랠리팀이 8년 만에 WRC 경기가 열린 그리스 랠리에서 2위를 차지했다. 지난 사파리 랠리 이후 오랜만에 포디움에 오른 오트 타낙의 활약에 힘입은 결과다.

지난 9월 9~12일 WRC 9라운드 그리스 랠리가 개최됐다. 정식 명칭은 에코 아크로폴리스 랠리 그리스(EKO Acropolis Rally Greece)로, WRC의 전신인 IMC(International Championship for Manufacturers) 시절부터 캘린더에 포함되었던 역사와 전통의 랠리 이벤트다. 1951년 처음 시작됐고 1973년 WRC에 포함되어 2009년까지 이어졌다. 그리스가 경제 위기로 휘청거렸던 2010년에 잠시 빠졌다가 이듬해 복귀해 2013년까지 열렸다. 이후에도 유럽 랠리 챔피언십(ERC)의 일원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당초 그리스는 이번 2021년 WRC 캘린더 후보지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칠레와 영국 랠리가 취소되면서 제9전이 되었다. 그리스의 WRC 복귀는 8년 만의 일이다.

아크로폴리스 랠리가 펼쳐진 그리스의 풍경. 사진 : WRC (https://www.wrc.com)

그리스 랠리는 ‘신들의 랠리’라는 멋진 애칭도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상징이자 장엄한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바로 그 장소다. 목요일 늦은 오후 아테네 시티 스테이지가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첫 번째 스테이지가 열렸다. 랠리 본부와 서비스 파크는 아테네 북쪽으로 220km 거리에 있는 라미아의 국립무역박람회장에 마련됐다.

다니 소르도는 사파리 랠리 이후 오랜만에 출전했다. 사진은 소르도와 올리버 솔베르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

현역 드라이버 중 세바스티앙 오지에(Sebastien Ogier)는 2011년 그리스 랠리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의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이 ERC 시절인 2014년에 우승한 바 있다. 하지만 브린은 이번에 나오지 않았다. 최근 M-스포트 포드팀과 2022년 풀 시즌 참전을 논의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3번째 차에 2~3명의 드라이버를 상황에 따라 기용하는 현대팀과 달리 브린은 안정적인 풀 시즌 출장을 원하기 때문이다.

현대팀에서는 벨기에 랠리 우승으로 기세가 오른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분위기 반전을 노리는 오트 타낙(Ott Tanak) 그리고 사파리 랠리 이후 3전 만에 복귀하는 다니 소르도(Dani Sordo)가 엔트리했다. 소르도는 최근 캉디도 카레라(Candido Carrera)를 새로운 코드라이버로 발표했다. 소르도는 시즌 초반에 기존 코드라이버였던 카를로스 델 바리오(Carlos del Barrio) 대신 보르하 로자다(Borja Rozada)를 영입했지만, 경기 중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럽지 않았다. 이에 WRC 출전 경험이 풍부한 카레라를 새로운 코드라이버로 결정했다.

아크로폴리스 랠리를 경험한 적 있는 누빌은 이번 랠리가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벨기에 랠리 우승 후 선두 오지에를 38점 차이로 추격하고 있는 누빌은 경기 전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힘든 경기가 될 겁니다. 2012년과 2013년 참전했던 아크로폴리스는 가장 거친 랠리 중 하나입니다. 아르헨티나보다도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2년 전 터키 랠리 준비를 위해 그리스에서 테스트했기 때문에 노면에 대한 경험은 있습니다. 구불거리며 돌이 많고, 기온도 높죠. 터키와 매우 비슷합니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랠리카와 타이어를 관리해야 하므로 매우 힘듭니다. 전략도 매우 중요하죠. 하지만 자신 있는 부분이라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대 C2 컴페티션에서는 피에르 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가 참전했고, WRC2 클래스에서는 벨기에에서 데뷔했던 신형 i20 N 랠리2가 그래블 랠리에 처음 실전 투입됐다. 운전은 이번에도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가 맡았다. 아울러 커스터머 서비스를 통해 또 한 대의 i20 N 랠리2가 WRC3 클래스에 참가했다. 람브로스 아타나술라스(Lambros Athanassoulas)는 WRC에서 14번의 출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으로 2009년 아크로폴리스에서 8위, ERC 시절이던 2015년에는 3위에 올랐던 경험이 있다. i20 N 랠리2로 출전하는 첫 프라이빗 드라이버(제조사 소속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출전하는 선수)다.

아크로폴리스 랠리는 거친 그래블(비포장 도로) 위주로 코스가 이뤄져 있다

도요타팀은 세바스티앙 오지에와 엘핀 에반스(Elfyn Evans),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의 3대 체제다.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는 다니엘 베리트의 부상으로 키튼 윌리엄즈를 임시 코드라이버로 삼았는데, 그마저도 개인 사정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엔트리를 포기했다.

포드팀은 2000년대 초반 아크로폴리스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린 전적이 있다. 이번에는 3대의 월드랠리카를 투입한다.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와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 그리고 그리스 출신인 요르단 세르데리디스(Jourdan Serderidis)다. 1964년생인 세르데리디스는 WRC 트로피와 WRC2 등 서포트 클래스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한편 티무 수니넨은 갑작스레 포드팀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핀란드의 프린트스포트를 통해 WRC2 클래스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쉐이크다운, 많은 비로 질척해진 노면의 상태. 사진 : WRC (https://www.wrc.com)

이번 아크로폴리스 랠리는 대부분 선수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최근인 2013년과 비교해도 코스가 많이 달라졌다. 게다가 생각지 못한 변수로 시작 전부터 혼란에 빠졌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많은 비가 내린 것이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레키(recce, 탐색 주행)는 물론 목요일 아침 쉐이크다운 테스트까지도 약간 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 속에서 진흙탕을 달리며 페이스 노트를 작성해야 했던 드라이버들은 엄청나게 미끄러운 진흙 노면이 마치 영국 랠리를 방불케 한다며 혀를 내둘렀다. 각 팀 역시 기상 예보와 노면 상태 변화를 체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주말에 날씨가 개어 노면이 마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페이스 노트 작성 당시와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목요일 늦은 오후 아테네 중심의 신타그마 광장에서 SS1이 시작됐다

9월 9일 목요일. 신타그마 광장 주변을 도는 0.98km 코스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1934년부터 그리스 의회가 사용해 온 19세기 왕궁 건물을 배경으로 치러진 오프닝 스테이지는 관중들을 위한 오프닝 이벤트에 가깝다. 아크로폴리스의 악명 높은 비포장 스테이지는 내일부터 시작이다.

아테네에서 첫날을 보낸 참가자들은 금요일 아침 서쪽으로 이동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악명 높은 ‘진짜’ 아크로폴리스 랠리를 시작했다. 5개 SS 합계는 89.4km로 경기 구간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이날은 중간에 서비스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트러블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17.54km의 아이 테오도리(SS2, SS4)와 19.4km의 루트라키(SS3)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코린토스(고린도)가 지척이다. 오후에 북동쪽으로 이동해 23.27km의 티바(SS5)와 11.65km의 엘라티아(SS6)까지 달리면 하루가 끝난다.

에반스는 기어가 3단에 고정되는 트러블로 인해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이동구간에서 교통체증이 발생해 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 노면이 빠르게 말랐다. SS2에서는 타낙이 오지에보다 0.2초 빠르며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종합 선두는 0.8초 빠른 오지에. 로반페라가 SS3를 잡으며 새로이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이 스테이지에서는 토요타의 에반스가 기어박스 트러블로 TC(타임 컨트롤)에 늦게 도착해 40초의 페널티를 받았다. 기어를 3단밖에 사용할 수 없어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누빌은 파워 스티어링에 문제가 생겨 직접 수리하는 등 기록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불운은 누빌에게도 찾아왔다. SS3를 마치고 타이어 피팅존에서 타이어를 교체할 때 파워 스티어링에서 누유를 확인하고는 수리를 시도하다가 SS4에 늦게 도착해 4분 페널티를 받았다. 누빌은 스티어링 어시스트 없이 고난도의 SS4 아이 테오도리를 달려야 했다. 소르도는 SS3 출발 직전 살짝 움직이는 실수로 10초 페널티를 받았고 솔베르그는 SS4에서 서스펜션 트러블로 리타이어했다.

피에르 루이 루베의 트러블로 인해 누빌은 노셔널 타임을 인정받았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SS4에서 로반페라가 연속 톱타임으로 선두를 달렸다. SS5에서 가장 빠른 것은 오지에. 누빌은 중간 서비스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미케닉이 되어야 했다. 파손된 파이프를 고치고 조금씩 새는 스티어링 오일을 보충하기 위해 브레이크 오일과 엔진 오일까지 사용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SS5를 2위로 역주했다. 이어진 SS6에서는 기록상 타낙이 가장 빨랐다. 그런데 루베가 트러블로 차를 멈추었을 때 노셔널 타임(notional time, 유사 시 주최 측에서 정상 주행 시의 기록을 산정해 인정하는 제도, 스플릿 타임 등으로 판단함)이 인정되어 누빌이 SS6를 잡았다.

금요일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로반페라가 타낙과 3.7초 차이로 종합 선두를 유지했다. 타낙은 오지에와 불과 0.2초 차이로 종합 2위. 3위 오지에의 20초 뒤에서 소르도가 맹추격 중이고, 그 뒤에는 30.3초 차이로 포모가 있다. 에반스는 선두에 4분 46.7초 뒤진 15위, 누빌은 선두와 6분 3.4초 차이로 16위다.

토요일은 132.56km의 거친 고지대를 주행하는 코스로 이뤄졌다

라미아에서 하룻밤을 지낸 참가자들은 9월 11일 토요일, 또다시 험난한 하루를 시작했다. 이날은 6개 스테이지 합산 132.56km의 대장정이다. 게다가 고지대라서 노면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미끄러웠다. 24.25km의 오프닝 SS7 파블리아니를 시작으로 24.81km의 SS8 그라비아를 달린 후 이테아에서 타이어를 교체. 이후 22.97km의 SS9 보크사이트와 18.14km의 SS10 엘레프테로리까지 달려야 비로소 라미아로 돌아가 중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후 파블리아니와 엘레프테로리를 다시 달려 토요일을 마무리했다.

타낙은 SS12를 우승하면서 토요일을 종합 2위로 마감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토요일의 주인공은 로반페라였다. 오프닝 SS7부터 내리 4개 스테이지를 잡으며 전·현직 챔피언 선배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중간 서비스를 받고 난 뒤에는 오지에와 타낙이 각각 SS11과 SS12를 잡았다. 로반페라는 랠리카 보호를 위해 서스펜션 세팅을 바꾸고 스페어 타이어 2개를 실어 마지막 2개 스테이지에서 페이스가 약간 떨어졌다. 그럼에도 2위 타낙과 30.8초라는 큰 여유를 두고 토요일을 마감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랠리카 보호와 트랙션 사이에서 최적의 세팅값을 찾기 위해 고전했다. 그 적절한 해답을 겨우 찾아낸 타낙은 오지에의 격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2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2.5초 차이까지 추격당했던 타낙은 탁월한 페이스로 SS12를 잡아 오지에와의 시차를 9.4초로 벌렸다. 소르도는 오지에보다 1분 29초 뒤에 자리한 종합 4위. 그 뒤로 포모와 그린스미스, 에반스가 뒤따랐다.

마지막 날 SS13의 스타트 모습. 사진 : WRC (https://www.wrc.com)

9월 12일 일요일. 최후의 전장은 라미아 서쪽에 마련되었다. 3개 스테이지 69.25km뿐이지만 이번 경기 코스 중 최장인 33.2km의 피르고스(SS14)가 포함되어 있다. 오프닝 스테이지이자 아크로폴리스 랠리를 상징하는 SS13 타잔의 길이는 23.37km. 최종 스테이지 겸 추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파워 스테이지인 SS15는 타잔을 다시 달린다. 다만 길이는 12.68km로 단축된다.

아침부터 내린 비가 흙바닥을 적셔 일부 구간을 진흙으로 만들었다. 미끄러운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로반페라가 17분 22.7초의 압도적인 페이스로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오지에보다 13.9초 빠르게 주행한 타낙은 시차를 23.3초로 벌리며 2위 자리를 굳혔다. SS13을 5위로 마감한 소르도는 4위를 유지했다. 치열한 5위 싸움을 벌였던 포드팀 듀오는 포모가 차를 고치느라 출발 시간에 늦는 바람에 그린스미스가 단독 5위가 되었다.

타낙의 파워 스테이지 주행 모습. 사진 : WRC (https://www.wrc.com)

이번 경기 최장의 SS14에서는 타낙이 가장 빨랐다. 와이퍼 문제로 시야가 좋지 않았지만, 올 소프트 타이어 전략이 주효했다. 반면 하드 타이어를 끼운 로반페라는 페이스가 떨어져 시차가 35초로 줄었다. 오지에, 소르도, 그린스미스는 3~5위를 유지했다. 한편, 7위까지 밀렸던 포모는 SS14를 두 번째로 빠르게 달려 에반스를 제치고 6위로 부상했다.

로반페라는 최종 스테이지까지 잡아 우승을 확정지었다. 파워 스테이지 포인트는 로반페라, 에반스, 오지에, 누빌, 타낙 순으로 나눠 가졌다. 현대팀에서는 타낙이 오지에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2위를 확정지었고, 오지에는 시상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해 180 포인트로 챔피언 타이틀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소르도는 종합 4위, 누빌은 8위로 아크로폴리스 랠리를 마감하며 제조사 포인트를 추가하는 데 힘을 보탰다. 제조사 챔피언십 포인트에서는 도요타팀이 49점의 대량 득점에 성공, 2위 현대팀에 57점차로 달아났다.

타낙이 아크로폴리스 랠리를 종합 2위로 마감하며 기분 좋은 포디움 소식을 전했다

그리스 랠리를 마친 WRC는 10월 1~3일 핀란드에서 제10전을 치른다. 이후 스페인을 거쳐 일본에서 시즌을 마감하는 일정. 그런데 최종전(제12전)이었던 일본 랠리가 전격 취소되었다.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대규모 이벤트 개최가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 랠리의 공백은 몬자 랠리가 대체한다. 원래는 이탈리아 몬자 서킷과 주변 도로에서 열리는 랠리 관련 이벤트로, 지난해 코로나 비상 상황에서 WRC 최종전으로 열린 바 있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글 솜씨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벌써 27년이다. <카비전>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자동차생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